체르너이 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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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체르너이 팔은 1950년대 헝가리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였으며, 이후 지도자로 활동하며 여러 클럽과 국가대표팀을 맡았다. 선수 시절에는 헝가리 리그에서 뛰었으며, 1956년 헝가리 혁명 이후 독일로 이주하여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감독으로서는 독일, 벨기에, 그리스, 포르투갈, 터키, 스위스, 헝가리 등 다양한 국가의 클럽을 지휘했으며, 북바덴 축구 협회 감독과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기술 고문을 역임했다. 특히 FC 바이에른 뮌헨을 이끌며 분데스리가 우승과 DFB-포칼 우승을 달성했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1994년 FIFA 월드컵 예선에 참가했다. 그는 대인 방어와 지역 방어를 결합한 '팔 시스템'을 개발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2013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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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르너이 팔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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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체르너이 팔 |
원어 이름 | Csernai Pál |
출생일 | 1932년 10월 21일 |
출생지 | 필리시, 헝가리 왕국 (1920–1946) |
사망일 | 2013년 9월 1일 |
포지션 | 미드필더 |
선수 경력 | |
유소년 클럽 | (정보 없음) |
클럽 | 1952–1953: 부다페스티 포스타시 SE (46경기, 2골) 1954–1955: 체펠리 바샤시 (46경기, 0골) 1956–1958: 카를스루에 SC 1958–1959: 라 쇼드퐁 1959–1965: 슈투트가르트 키커스 |
국가대표 | 1955: 헝가리 (2경기, 0골) |
감독 경력 | |
감독 | 1968–1970: 바커 04 베를린 1970–1971: SSV 로이틀링겐 05 1971–1972: 로열 앤트워프 1973–1977: 북바덴 축구 협회 1978–1983: 바이에른 뮌헨 1983–1984: PAOK 1984–1985: 벤피카 1985–1986: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1987–1988: 페네르바흐체 1988: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1990: 영 보이즈 1990–1991: 헤르타 BSC 1993: 북한 1994–1995: 쇼프론 |
2. 선수 시절
그의 가족은 가문의 성에 따르면 트란실바니아의 세켈리 출신으로, 체르너이(Csernai)는 "체르너(Cserna, 현재의 루마니아 체르네(Cerne))에서 온"이라는 뜻을 내포한다. 선수 시절 경력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부다페스트를 연고로 하는 셰펠 SC에서 준수한 활약을 하였고, 1955년 매직 마자르 시대 말의 헝가리 축구 국가대표팀에 두 차례 차출되었다.[1]
체르너이 팔은 선수 은퇴 후 독일, 벨기에, 그리스, 포르투갈, 터키, 스위스, 헝가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등 여러 나라의 클럽과 국가대표팀 감독을 역임했다.
1956년 헝가리 혁명이 일어나자 다른 위대한 헝가리 선수들처럼 독일로 도주하여 당시 1부리그에 속해 있던 카를스루에 SC의 선수가 되었다. 1959년에서 1965년까지는 2부리그의 슈투트가르트 키커스 선수로 활약하였으며, 1962년에는 3부리그 강등을 막는 결정적인 득점을 하였다.
필리시 출생으로, 헝가리 왕국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하여, 부다페스트 포스타스,[2] 체펠, 카를스루에 SC, 라쇼드퐁 그리고 슈투트가르터 키커스에서 클럽 축구 선수로 활동했다.[3]
3. 감독 경력
1990년대 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았다. 1991년 6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축구 협회와 6개월 계약을 맺고 홍현철 감독의 기술 고문으로 활동하며,[4][5] 북한이 친선 경기에서 미국을 2-1로 꺾는 데 기여했다.[6] 1993년 10월 홍현철 감독이 해임된 후에는 직접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임명되어 1994년 FIFA 월드컵 아시아 지역 최종 예선에 참가했다. 이라크를 3-2로 이기며 긍정적인 출발을 보였으나, 이후 대한민국과의 라이벌전 0-3 패배를 포함해 나머지 4경기에서 모두 패했다. 북한 당국은 체르너이에게 감독직 연장을 제안했지만, 시민권 취득 문제를 우려하여 헝가리로 돌아갔다.[7]
그는 트레이드 마크인 실크 스카프를 착용하는 것으로 유명하며, 대인 방어와 지역 방어를 결합한 "팔 시스템"을 개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8]
3. 1. 초기 경력
1967년, 쾰른에서 헤네스 바이스바일러의 지도 하에 코칭 라이선스를 획득했다. 1968년, 당시 2부 리그인 서베를린 리그에 속한 바커 04 베를린의 감독이 되었다. 그는 2년간 바커의 감독을 맡으며 리그 4위와 5위로 시즌을 마무리하였다. 이후, 남부 리그에 속한 SSV 로이틀링겐의 감독을 맡아 리그를 15위로 마감하였다. 로이틀링겐 감독직을 거친 전후의 순위는 순서대로 11위와 10위였다.
1971년부터 1972년까지, 그는 벨기에의 로열 앤트워프 FC의 감독이 되었으나, 얼마 가지 않아 에디 바우터스와 교체되었다.
1973년 독일에 복귀한 체르너이는 북바덴 축구협회의 감독이 되었고, 그곳에서 4년을 머물렀다. 그는 1973년 아마추어 컵 우승을 하며 감독으로서의 첫 타이틀을 획득하였다. 이 컵은 독일 아마추어컵 대회로, 주로 최고 아마추어 리그인 3부 리그 팀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1977년 1월, 그는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에서 FC 바이에른 뮌헨으로 이적한 로란트 줄러의 후임 감독이 되었다.
3. 2. FC 바이에른 뮌헨
체르너이 팔은 1977년 1월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에서 FC 바이에른 뮌헨으로 이적한 로란트 줄러 감독의 후임으로 뮌헨의 감독이 되었다. 로란트 감독 시절 뮌헨은 "변덕스러운 디바"로 불리며 실망스러운 결과를 냈고, 1976-77 시즌에는 12위라는 최악의 성적을 기록했다.[4]
로란트 감독 경질 이후, 빌헬름 노이데커 회장은 막스 메르켈을 새 감독으로 영입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선수들의 비공식 투표를 통해 체르너이가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체르너이는 시즌 말, 바이에른을 리그 4위로 이끌었다.
1979-80 시즌을 앞두고 제프 마이어, 한스게오르크 슈바르첸베크, 브란코 오블라크 등 주축 선수들이 은퇴하거나 부상으로 이탈하면서, 체르너이는 팀을 재건해야 했다. 그는 파울 브라이트너와 카를하인츠 루메니게를 중심으로 한 "팔 시스템"을 구축했고, 이 듀오는 "FC 브라이트니게" (FC Breitnigge) 로 불리며 뮌헨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루메니게는 세 차례 분데스리가 득점왕을 차지했다.
체르너이 감독의 첫 풀 시즌인 1979-80 시즌, 바이에른은 6년 만에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같은 시즌 UEFA 컵 준결승에 진출했으나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에게 패했다.
1980-81 시즌에는 리그 타이틀을 방어했고, 유러피언컵 준결승에 진출했으나 리버풀 FC에게 원정 다득점 원칙에 의해 탈락했다. 1981-82 시즌에는 DFB-포칼 우승을 차지했고, 유러피언컵 결승에 진출했으나 애스턴 빌라 FC에게 패했다.
1982-83 시즌, 바이에른은 리그에서 부진했고, UEFA 컵 위너스컵 8강에서 알렉스 퍼거슨 감독의 애버딘 FC에게 패했다. 체르너이는 거만한 태도로 문제를 일으켰고, 결국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라인하르트 자프티히가 감독 대행을 맡은 뒤 우도 라텍이 그의 뒤를 이었다.
3. 3. 뮌헨 이후
체르너이 팔은 바이에른 뮌헨 감독직에서 물러난 후 PAOK FC의 감독이 되었다. UEFA 컵 2라운드에서 친정팀 바이에른과 맞붙었는데, 1, 2차전에서 PAOK는 바이에른과 득점 없이 비겼고, 승부차기 끝에 바이에른이 9-8로 승리했다. 바이에른은 다음 라운드에서 그 시즌 우승팀인 토트넘 홋스퍼 FC에게 패해 탈락했다. 체르너이는 그 시즌을 무관으로 마쳤고, 한 시즌 더 머무른 뒤 SL 벤피카로 이적했다.
벤피카에서는 FC 포르투와의 포르투갈 컵 결승전에서 3-1로 승리하며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나 선수들에게 별다른 인기를 얻지 못했고, 결승전 라인업을 발표할 때쯤 카를루스 마누엘, 피에트라와 같은 베테랑 선수들에게 라인업을 맡기는 등 권력을 잃었다. 결국 한 시즌 만에 벤피카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페네르바체 SK,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BSC 영 보이즈, 헤르타 BSC 베를린의 감독을 맡았으나, 단 한 곳에서도 한 시즌을 পুরোপুরি 채우지 못했다. 도르트문트에서는 2경기를 남기고 팀이 16위에 머물렀을 때 경질되었고, 프랑크푸르트에서는 9경기, 베를린에서는 6경기만 지휘하는 등 다른 팀에서도 짧은 임기를 보냈다.
그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아 1994년 FIFA 월드컵 예선에 참여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후 조국 헝가리로 복귀해 1부 리그의 FC 쇼프론 감독을 맡았지만, 최하위로 리그를 마감하며 강등되었다.
1990년대 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 국가대표팀과 관계를 맺었다. 1991년 6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축구 협회와 6개월 계약을 맺고 홍현철 감독의 기술 고문으로 활동했으며,[4][5] 이 기간 동안 북한은 친선 경기에서 미국을 2-1로 꺾었다.[6] 1993년 10월 홍 감독이 해임된 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축구 협회는 체르너이를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임명했다. 1994년 FIFA 월드컵 아시아 지역 최종 예선에서 이라크를 3-2로 이기며 긍정적으로 시작했지만, 나머지 4경기에서 모두 패했다. 특히 마지막 경기는 라이벌 대한민국에게 3-0으로 패한 경기였다. 북한 당국은 그에게 감독직을 계속 맡아달라고 요청했지만, 체르너이는 시민권 취득을 우려하여 헝가리로 돌아갔다.[7]
그는 트레이드 마크인 실크 스카프를 착용하는 것으로 유명하며, 대인 방어와 지역 방어를 결합한 "팔 시스템"을 개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8]
3. 4.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표팀
체르너이 팔은 1990년대 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대표팀과 관계를 맺었다. 1991년 6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축구 협회와 6개월 계약을 맺고 홍현철 감독의 기술 고문으로 활동했다.[4][5] 이 기간 동안 북한은 친선 경기에서 미국을 2-1로 꺾었다.[6]
1993년 10월 홍현철 감독이 해임된 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축구 협회는 체르너이 팔을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임명했다. 팀은 1994년 FIFA 월드컵 아시아 예선 최종 라운드에 참가하기 위해 카타르로 떠났다. 이라크를 3-2로 이기며 긍정적으로 시작했지만 나머지 4경기에서 모두 패했는데, 마지막 경기는 라이벌 대한민국에게 3-0으로 패한 경기였다. 북한 당국은 그에게 감독직을 계속 맡아달라고 요청했지만, 체르너이는 그들이 시민권을 얻도록 하려는 노력에 대해 우려하여 헝가리로 돌아갔다.[7]
3. 5. 헝가리 복귀
1994년 FIFA 월드컵 예선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았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7] 이후 조국 헝가리에 복귀해 1부 리그의 FC 쇼프론 감독을 맡았으나 최하위로 리그를 마감하여 강등되었다.
1990년대 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관계를 맺었다. 1991년 6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축구 협회와 6개월 계약을 맺고 홍현철 감독의 기술 고문으로 활동했다.[4][5] 이 기간 동안 북한은 친선 경기에서 미국을 2-1로 꺾었다.[6] 1993년 10월 홍현철 감독이 해임된 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축구 협회는 체르너이를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임명했다. 1994년 FIFA 월드컵 아시아 예선 최종 라운드를 위해 카타르로 떠난 북한 대표팀은 이라크를 3-2로 이기며 긍정적으로 시작했지만, 나머지 4경기에서 모두 패했다. 특히, 마지막 경기는 라이벌 대한민국에게 3-0으로 패한 경기였다. 북한 당국은 체르너이에게 감독직을 계속 맡아달라고 요청했지만, 그는 시민권을 얻도록 하려는 노력에 대해 우려하여 헝가리로 돌아갔다.[7]
4. 사망
5. 감독 통산
DFB-포칼: 1981